아빠의 신발을 고르는 일은, 발보다 마음에 맞춰가는 일이었다
낡은 나이키 한 켤레에서 시작된 의심
낡은 나이키 운동화.
이상하게 발 안쪽만 유난히 닳아 있었고, 밑창은 눌러있었다.
그때부터 아빠의 발걸음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 번도 발이 아프다고 말한 적도, 신발을 바꿔달라고 한 적도 없는 아빠.
"이게 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아빠의 걸음걸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걷는 모습에서 알게 된 단서
다음 날,
나는 뒤에서 아빠 걸음걸이를 몰래 영상으로 찍었다.
눈에 띄게 뒤꿈치가 아닌 옆면이 안쪽으로 눌려 있었고 걷는 모양도 엉성했다.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감이 아니라 관찰이 맞았다.
신발 사이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빠는 키 185cm, 팔 다리가 길고 마른 편이지만 어깨가 넓어서 2XL도 작다고 할 정도다.
그 시대엔 정말 드물던 체형이라, 그 시절엔 너무 커도 불편한 일이었었다.
평소 280 사이즈를 신는다고 하셨기에 당연히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280 이상 나오는 신발이 드물어 그냥 발을 구겨 넣고 다니신 거였다.
발볼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고, 무게 중심은 안쪽으로 쏠려 있었다.
걷는 방식이 불균형할 수밖에..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아빠의 발에 무관심했다는 걸.
그렇게 말 없이 시작된 신발 검색
"발볼 넓은 290 사이즈 신발"
이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고, 발볼이 넓고 푹신한 신발들을 아빠 몰래 주문했다.
아무 말 없이.
첫 번째 갈등 시작
신발이 도착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아빠에게 내밀었다.
경상도 집안의 정서는 언제나 직선적이다.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나온 말.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깐 그러네..”
????
쑥스러우신가보다.
"아니 발 아파서 못 신는다니깐!!!!!!"
그때서야 알게 됐다.
아빠는 지간신경종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간신경종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기까지
지간신경종.
그 생소한 단어를 알기 위해,
"지간신경종 탈출 "이라는 카페에서 검색을 몇 시간이나 뒤졌다.
에어쿠션이 빵빵한 기능성 신발을 신어야 발이 편해진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락포트, 뉴발란스, 크록스, 스케쳐스.
외국 브랜드들이 대체로 사이즈가 크고 발볼이 넓게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290~300 사이즈는 가격도 비싸고 수량도 적었다.
하나하나 주문해서 직접 신겨보는 수 밖에.
아빠만 아니면…
문제는 늘 예상 밖에서 나온다.
아빠는 쿠션이 높은 신발을 싫어했다.
왜
대체 왜
키가 더 커 보인다는 이유였다.
아 진짜… 아빠만 아니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발을 또 주문했다.
반품 내역만 한가득..
신발 하나 바꾸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스케쳐스는 무료 교환·반품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반품 내역에 구구절절 사연을 쓰며 나도 민망했고, 아빠도 불편해했다.
답답하게 이유도 안 말해주고,
그냥 불편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결국 나이키만 신겠다고 고집하셨다.
한 장의 깔창이 보여준 이유
그러다 우연히, 나이키 신발 안에 손을 넣었다.
그제야 알았다.
발가락 밑, 그러니까 발바닥 부분에만 에어가 들어간 깔창이 들어 있었다.
아빠가 그 신발만 편하다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맙소사.
드디어 찾은 꿀 조합
나는 300mm짜리 에어 깔창을 따로 검색해 구매했고, 새로 산 신발마다 하나씩 깔아드렸다.
그제야 아빠가 말없이 신었다.
바뀐 건 발걸음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
발을 끄는 소리가 줄어들었고, 허리가 펴지면서 자세가 곧아졌다.
아빠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지만
우리는 안다.
아빠의 불편함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그걸 보는 내 마음이 덜 미안해졌다는 것.
나는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다만, 말 없는 불편함을 놓치지 않으려 오래 바라봤을 뿐이다.
누구의 불편함도 말로 오지 않는다.
'관찰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괜찮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것들. (0) | 2025.05.02 |
---|